최치원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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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치원생애

중국 양주시 당성유지 최치원기념관

중국 양주시 당성유지 최차원광장 기념비

文昌侯 孤雲 崔致遠 先生은 헌안왕 원년 서라벌[경주] 사량부에서 탄생했다. 최치원 선생은 6두품이란 신라 신분제도의 한계를 넘고자 12세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아버지 견일은 유학을 보내며 아들에게 “10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아버지로 생각하지 마라, 나도 아들이라 하지 않겠다”라고 했을 만큼 당시 신분적 한계가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은 인백기천[人百己千, 남이 백 번 할 때, 나는 천 번의 노력을 했다] 의 정신으로 6년 만에 빈공과에 급제하고 율수현 현위로 임명되었다. 당시에 율수현 관할지역인 남쪽 고순 초현관에 머물던 중, 쌍녀분의 사연을 듣고 詩를 지어 위로하자 꿈에 두 여인이 나타나 서로의 詩를 주고받고 사랑을 나누었다는 ‘쌍녀분’ 전실이 전해지고 있다.

황소의 난(875~884)으로 당나라 정국이 불안한 시절, 최치원은 회남절도사 고병의 발탁으로 도통순관직에 임명되고,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때 황소를 토벌하자는 ‘격황소서’를 써 보냈는데,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두려움에 그만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그 공로로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의 직함과 자금어대까지 하사받았다.

28세에 귀국을 결심하고 당나라를 떠나 이듬해 3월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헌강왕에게 귀국 때까지 공사(公私) 간에 쓴 글을 편집한 계원필경(桂苑筆耕)을 올렸다. 총 20권에 달하는 계원필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으로, 唐의 관리 임용 제도를 참고한 것이다. 이후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를 제수받았다.

최치원은 골품제와 혼란이 가중된 신라를 개혁하고자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리고 6두품 최고의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 그러나 진골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중앙직을 사직하고, 백성을 위해 지방관직으로 태산군(現 전북 정읍), 부성군(現 충남 서산), 천령군(現 경남 함양) 태수 등 지방관을 지내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최치원은 지방관직을 그만두고 전국 산야를 순례하며 부산 해운대 동백섬에 해운대(海雲臺)라고 바위에 쓴 것이 지금의 해운대가 되었으며, 경북 의성의 고운사에 잠시 머물렀었을 때, 최치원은 고운사에 머물면서 여지, 여사 두 대사와 가운루(駕雲縷), 우화루(羽花樓)를 건립했다. 이런 연유로 이후에 고운사는 최치원 선생의 호를 따 외로울 고(孤), 구름 운(雲)의 고운사(孤雲寺)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