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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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치원유적

최치원은 당시의 새로운 국가체제와 사회질서 확립을 위해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 본원에 바탕을 둔 사상과 진리의 보편타당성을 추구함으로써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즉 유교·불교·도교의 제사상(諸思想)을 상호 융합시켜 혼돈된 사회의 인간 제화(諸和)를 위한 이념으로 삼고자 하였다.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화랑도의 풍류에 이미 유·불·선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로써 군생(群生)을 교화시킬 수 있다고 기록하였다. 자연, 만물과 인간의 조화 사상에 근거한 최치원의 포용적 사회통합 방안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림공원


경남 함양 상림공원

경남 함양군 함양읍의 외곽 지대를 둘러싸고 있는 숲으로, 신라 진성여왕 말기 지방관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했다. 1130년의 역사를 간직한 함양 상림의 기원은 분지의 중앙을 가로지르던 위천이 자주 범람하자, 최치원은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린 뒤 둑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으로 나무를 심으면서 조성됐다. 또한,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야산의 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하며, 이러한 숲이 조성된 것을 기적과 같은 일로 여겼다. 당시 최치원은 이 숲을 잘 보호함으로써 홍수의 피해를 막고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대관림'이라 이름을 지었다. 현재 천연기념물 제154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120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고운사(가운루‧우화루)


고운사 가운루


고운사 우화루

천년의 세월을 품고고 있는 고운사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절로,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입산하여 수도하면서 여지(如智)·여사(如事) 두 대사(大師)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였다. 고운사를 에워싸고 있는 등운산(騰雲山) 아래 세 마리 거북 형상의 산봉우리에 기대어 북에 대웅전, 서에 극락전, 동에는 탑을 세웠다고 한다. 고운사 우화루 흘러내리는 계류 위에 걸쳐 앉은 가운루는 누(樓)형식의 건물로 조계문과 천왕문을 들어서면 서향한 정면이 바로 보인다. 이 건물은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리라 여겨지는데, 1676년(숙종 2)과 1717년의 중수기가 남아 있다. 건물의 전면과 양 측면은 판벽으로 구성되었고, 전면 중앙 3칸에는 가운데 설주가 있는 쌍여닫이 판창문이, 남측면에는 판문으로 된 출입문을 두었다. 북측면의 동쪽 칸에 치우쳐서 누각을 오르내리는 계단이 나무로 짜여 있고 양여닫이 판문을 달아 누에 들게 하였다. 동향인 배면은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돌려 개방하였다. 계곡 바닥 암반에는 둥글고 긴 초석을, 지면에는 막돌 덤벙주초를 두어 누하주를 세우고 우물마루를 깔아 누상주를 설치하였다. 기둥은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으로 하였고, 주두(柱頭)의 바깥쪽은 초익공으로, 안쪽으로는 초각된 보아지로 들보를 받쳤다. 그러나 건물 네 귀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는 2익공으로 짜여져 있다. 지붕가구는 5량가로 들보 위에 두꺼운 판재를 포개놓아 중도리와 종보를 받았으며, 종보 위에는 고졸한 모양의 화반과 첨차를 직교하여 마루도리를 올려놓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시대, 특히 중기의 양식이 지배적이기는 하나 각 부분의 세부형식이 각기 다른 시대의 수법을 보여 몇 차례의 중수과정을 짐작게 하고 있다. 그러나 초익공계 건물에 귀기둥만 2익공으로 꾸민 점이나, 산지 가람에서 계류 위에 꾸민 누형식 등은 흔치 않은 예이다.

해운대 석각


부산 해운대구 동백섬 해운대 석각

부산 해운대구 동백섬 ‘海雲臺’ 석각은 통일신라 말 대문장가이자 최고의 석학이신 고운 최치원 선생이 바위에 음각한 글로 어지러운 정국을 떠나 가야산으로 입산할 때, 이곳을 지나다가 자연경관이 너무나도 아름다움에 심취되어 이곳에 臺를 쌓고, 바다와 구름, 달과 산을 음미하면서 주변을 거닐다가 바위에다 ‘海雲臺’란 세 글자를 음각함으로써 해운대의 지명이 되었다.